티스토리 뷰
목차
2006년에 개봉한 영국영화 더 퀸은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사망 당시 영국 정부와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감독은 스티븐 프리어스로 주연으로는 헬렌 미렌, 마이클 쉰의 출연으로 만들어졌으며, The Queen의 뜻은 여왕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더 퀸 영국 왕실 실화 영화 줄거리
1997년 5월의 영국은 토니 블레어가 총리 인증을 받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중도좌파인 노동당 당수이며, 그의 아내는 군주제 폐지론자였기에 여왕은 탐탁지 않았습니다. 보수 정당은 부자 위주 정책을 하지만, 진보 정당은 서민 위주 정책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국민들도 예전처럼 왕실에 복종을 하지 않게 됩니다. 왕실을 비난하기도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때 불행하게도 프랑스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1997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 당시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이미 왕실을 떠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가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왕실은 법도에 따라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반응은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다이애나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추모 행렬은 끊이지 않았고 추모의 열기가 뜨거워졌습니다. 냉담하게 대하는 여왕과 달리 토니 블레어는 TV 생중계로 추모 성명을 발표합니다. 정치인이 국민의 정서와 함께 한다는 것이지만, 여왕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왕은 추모 성명은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정작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어린 두 왕자를 데리고 발모랄 성으로 잠시 떠나 있습니다. 그 사이, 다이애나 비의 죽음과 관련해 조기 게양도 하지 않고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없는 여왕에 대해 국민들은 날로 불만이 심해지고 각종 언론들도 여왕의 태도를 점점 비난하게 됩니다. 심지어 군주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체제 위기론까지 거론되면서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록 일관했던 왕실의 반응은 영국 국민들의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었습니다. 왕실 지지도는 계속 떨어지는데 총리의 지지율을 더 올라가게 됩니다. 블레어의 아내는 그래서 군주제는 폐지해야 된다고 남편에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블레어는 왕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왕에게 전화해서 런던으로 돌아와 추모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더 퀸 영국 왕실 결말
여왕의 휴가지 평원에서 혼자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게 되고, 그때 여왕은 거대한 뿔이 달린 멋진 사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런던으로 돌아가기 직전, 그 사슴은 사냥을 당해 죽게 되고 여왕이 그 사체를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블레어에게 전화를 받고 여왕은 런던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때 한 꼬마가 꽃을 줍니다. 여왕은 다이애나 관에 놓아달라는 건 줄 알았지만, 꼬마는 여왕에게 주는 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국민들이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 여왕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장례식이 치러지고, 여왕이 정식 추모식을 발표하며 국민의 혼란도 마무리가 됩니다. 2개월 후, 블레어가 찾아와서 지난번에 일에 대해 사과를 합니다. 여왕은 그렇게 미움을 받아 본 건 처음이라고, 시대가 변했으니 생각도 바꿀 때가 됐다고 말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더 퀸 시대적 배경과 주요 인물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아버지이자 선왕인 조지 6세가 사망함에 따라 25세의 나이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로 최초로 맞이하는 여왕에 영국 국민들은 대체로 환호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70년간 왕위를 지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사망 이틀 전 임명한 리즈 트러스까지 총 15명의 영국 총리를 지켜봤습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에는 이미 현대적 입헌군주제가 자리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실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영국을 위해 힘쓰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예로 들자면 탈식민화가 진행되며 영국의 권위가 실추되던 때 영연방을 지키기 위해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소속 국가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조부 조지 5세가 테크의 메리와 함께 인도 황제로서 즉위한 델리 더비 행사가 1911년에 있는 후 다시 한번 인도를 방문하였으며, 그 결실이 열매를 맺어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는 영국 연방의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영국의 권위를 회복시킨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도 다이애나 스펜서 사건으로 대표되는 자식들의 가정사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장남 찰스 3세는 부인을 두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이런 와중 다이애나가 찰 수와 이혼한 뒤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자연스레 그 비난은 찰스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향하게 됩니다. 이후 이혼녀를 싫어하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사망 이후, 카밀라와 재혼해 영국 국민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장녀 앤 공주도 이혼 후 재혼했으며, 차남 앤드루 왕자는 부인 사라 퍼거슨과 이혼합니다. 유일하게 이혼을 하지 않은 자녀는 막내 에드워드 왕자 부부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공주 시절부터 2차 세계 대전에 운전병으로 참전하여 성실히 복무하고 윈저 성 대화재 당시 복구 비용으로 세금이 쓰이는 데에 국민적 질타가 커지자 스스로 왕실의 면세 특권을 폐지하는 등 스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 전 세계적 존경과 경의를 받아왔습니다. 생존 당시 현직인 국가원수 중 가장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 총리 임명과 같은 공식 일정을 소화해 내며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이렇듯 대영제국의 명멸을 지켜보며 영국 와 영연방 왕국의 존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끝에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에 달하는 재위 끝에 향년 96세의 나이로 밸모럴 성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왕실은 관습에 따라 여왕의 부고 소식을 버킹엄 궁 대문에 걸어 알렸으며 영국은 10일간의 추모기간을 가졌습니다. 전 세계의 국가 정상들과 기업, 유명 인사와 수많은 대중들의 추모가 이어졌습니다.
토니블레어는 1953년 5월 6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시기의 영국 총리 중,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 때 태어난 최초의 총리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성장기의 대부분을 스코틀랜드에서 지냈지만, 스코틀랜드인은 아닙니다. 집안은 원래 잉글랜드 북부 출신이고 정치적 입지를 다니 곳도 잉글랜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와 달리 스코틀래드 억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10세 때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페티스 칼리 지을 다녔습니다. 엄격한 교칙과 선배 학생들에 의한 부조리에 반발하여 무단으로 교정을 이탈하기도 했으며,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71년에 페티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1년 정도 알바를 하며 지냈으며 그 덕에 프랑스어가 유창합니다. 돌아와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녔으며 전공은 법학이었고,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록밴드 보컬을 했으며 빈드이름은 어글리 루머스. 대학교 졸업 후에 영국 노동당에 입당했고, 법률 사무소에서 만난 동료 셰리와 1980년에 결혼하였습니다. 영국 노동당 출신으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총리로 재임했습니다. 영국 정계에 제3의 길을 처음으로 내세운 정치인으로, 20세기 영국 총리 중 최연소로 집권했으며 노동당 출신 총리 중 가장 오랜 기간 집권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치세에 출생한 최초의 총리이기도 합니다. 취임 2개월 후 홍콩이 반환되면서 대영제국의 마지막 총리이기도 합니다.
영화 더 퀸 소감
더 퀸을 보고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평생의 삶이 영국을 위해서 살았던 분이었으며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며, 특히 여왕으로서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였습니다. 그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며 그대로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차가운 왕실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던 영국 국민들도 이해가 되고, 늘 자신의 자아는 뒤로한 채, 감정을 숨기고 의무를 먼저 생각하라고 배운 여왕도 공감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 영국여왕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 그녀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왕이 국민의 비난을 견디기가 어려워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여왕의 결정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감동과 눈물을 원하지만 난 느낌을 대놓고 표현하지 못해. 가슴에 간직할 뿐. 난 그렇게 배웠고 그걸 지키려고 노력한 거뿐이지. 근데 세상이 변했군. 생각을 바꿔야 할 때겠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인지 생각하게 됩니다.